수능 범위 아닌 선택과목 누가 듣겠나고교학점제 시행 100

#1. “고교학점제 도입과 함께 내신을 5등급제로 변경하면 맞춤형 교육이 가능해지고, 입시 부담이 줄어든다고요? 지금 고1 애들은 멘붕이에요. 1등급 아니면 서울·수도권 대학에 못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아이의 상실감이 상상을 초월해요. 그렇다고 벌써부터 수능, 정시에 올인하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면 2~3학년 때 선택과목 들을 이유가 없고, 사실상 학교 공부에서 손을 떼야 하는데, 부모로서 이렇게 하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요.”(서울 구로 소재 일반고 1학년 학부모. 조아무개(48)씨)

#2. “아이의 중학교 성적이 최상위권이었고, 목표 대학이 서울대와 카이스트여서 자사고에 보냈어요.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선택과목의 폭이 넓은 자사·특목고가 훨씬 유리하다는 컨설팅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중간고사에서 내신 2.5등급을 받고나서는 일반고로 전학시켜달라고 졸라요. 실제 전학 갔거나 전학을 고민 중인 친구들, 자퇴했거나 자퇴를 고민하는 친구도 여럿이라고 해요. 내신등급이 좋지 않아 지금부터라도 정시를 목표로 해야 하는데, 굳이 수능 출제 범위도 아닌 선택과목을 2~3학년 때 수강하며 시간을 낭비할 이유도, 학교에 계속 다닐 필요도 없다는 게 자퇴를 고민하는 이유죠. 마음 같아서는 자퇴해 검정고시를 본 뒤, 수능을 1년이라도 빨리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서울 소재 자사고 1학년 학부모. 최아무개(43)씨)

 

내신 5등급 상대평가 한계

고교학점제가 도입된 지 100일, 학교 안팎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 교사는 업무 부담 가중을 호소하고, 학생은 고교학점제에 따른 내신 완화로 인한 학업 부담과 선택과목 선택의 딜레마를 토로한다. 실제 중간고사를 치른 고1 학생들 사이에서는 변경된 내신 ‘5등급 상대평가’에 대한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서울 소재 외고 1학년 손아무개군은 “실수로 틀린 1~2문제 차이로 내신이 1등급이 2등급이 되고, 1등급이 3등급이 되기도 한다”며 “좋은 대학 가려면 최소 내신 1등급(10%)이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전 과목 100점에 가깝게 맞아야 하는데. 내신등급 완화로 오히려 내신 부담감이 훨씬 더 커졌다”고 토로했다.

올해부터 전면 시행된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해 졸업하는 제도다. 학생들은 공통과목 외에 다양한 교과목을 선택한 뒤 이를 이수해 누적 학점이 192점 이상이면 졸업할 수 있다. 다만 과목출석률(수업 횟수의 3분의 2 이상)과 학업성취율 40%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

고교학점제는 앞서 2012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당시 핵심 교육으로 언급한 공약 중 하나로, 애초 내신과 수능의 ‘절대평가’를 전제로 추진됐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에서 내신을 5등급 상대평가로 변경하는 대신 수능을 현행 9등급 상대평가 체제로 유지하기로 하면서 학생들은 진로보다 입시에 유리한 과목을 고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리게 됐다.

즉, 내신과 수능의 절대평가를 고려한 고교학점제 취지에 역행하는 내신 상대평가 비중 확대, 수능 9등급 상대평가 체제 유지 등 정책의 엇박자가 고교학점제 시행 이후 교육 현장의 혼란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학생들은 내신 부담감 때문에 전공과 진로에 따른 자율선택권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했다.

 

수능 공통과목에서만 출제?

‘2028년 대입개편안’에 따라 202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공통사회·통합과학 등 통합형으로 출제된다. 이에 따라 고1 학생들의 경우 2~3학년 때 수강하는 사회와 과학 선택과목이 없는 수능시험을 치른다. 학생들로서는 수능을 위해 굳이 선택과목 수업을 듣거나,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내신을 잘 받으려면 내신 등급 획득이 유리한 과목을 택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일부 과목으로의 수강생 쏠림 및 수강인원 미달로 인한 폐강 속출은 물론 선택과목이 수시를 준비하는 학생들만을 위한 전유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유성룡 1318대학진학연구소장은 “내신 5등급제에서 3등급 이하는 수시전형으로 이른바 ‘좋은 대학’을 가기 힘들다. 이들이 좋은 대학을 가려면 수능 공부밖에 없는데, 내신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들을 리 만무하다”며 “‘2028 대입개편안’ 체제에서 이른바 ‘정시파’ 학생들은 사회·과학 선택과목 수업을 듣는 것이 시간낭비일 수 있다.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수업 파행을 줄이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고1 학생들 사이에서는 ‘진로 선택에 따른 선택 과목 수강’에 대한 회의론은 물론 선택과목 수강 기피 움직임이 팽배하다고 한다. 서울 영등포구 일반고 1학년 이아무개(17)군은 “2학년 때부터 선택 과목을 듣기 위해서는 진학 목표 대학과 학과를 선택해야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바뀌는 상황에서 쉽게 결정하기 힘들다”며 “어차피 선택 과목은 수능시험 범위에도 포함되지 않는데, 진로와 적성과 무관하게 아이들이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 선택하려고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학은 무전공 선발하면서

고등학교에서는 고교학점제를 통해 진로와 적성 맞춤 수업을 하게 했지만, 정작 대입에서는 대학의 자유전공·무전공 선발을 확대하도록 하는 등 교육부의 ‘엇박자’ 정책도 고교학점제로 인한 혼란, 무력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학생들로서는 무전공 선발이 늘어난 상황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진로에 따른 선택과목을 수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서울 강남구 소재 일반고 1학년 학생은 “어차피 정시로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은데, 수능 시험 범위가 아닌 내신에만 반영되는 2~3학년 과정의 선택과목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을 것 같다”며 “무전공·자유전공 모집이 확대되는 추세 속에서 진로와 적성에 맞는 선택과목을 고등학교 때 듣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친구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소재 일반고 1학년 학생도 “희망 학과보다는 가고 싶은 대학 위주로 선택해 무전공 또는 자유전공으로 진학하려고 한다”며 “진학하고자 하는 학과에 맞춰 선택과목을 들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 선택과목을 정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경기 소재 고교 교사는 “고등학교 때 학생이 진로와 적성에 맞게 과목을 선택해 수강하더라도, 정작 대입 원서를 쓸 때 ‘자유전공·무전공학과’를 쓰겠다고 하면 사실상 선택과목 들은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 아니냐”며 “‘수시 포기 정시 올인’ 학생들은 물론이고, 진로와 적성을 고려해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이나 진로를 변경한 학생들도 선택과목을 수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다. 이는 안타깝지만 예측가능한 미래”라고 말했다.

이와 별개로 고교학점제가 미이수 학생으로 낙인 찍힌 학생들의 학습 무기력과 좌절감을 부채질해, 자퇴를 부추기는 등의 역효과를 낼 가능성도 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교원단체 고교학점제 폐지하라

교사들 사이에서도 ‘고교학점제 폐지’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교사노조연맹 등 교원단체들은 지난 5월8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고교학점제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고교학점제는 경쟁 위주 입시교육 완화를 위한 ‘학생 선택권 보장 및 맞춤형 교육’이라는 이상을 내세웠지만 현실은 정반대”라며 “고교학점제는 개혁이 아닌 개악으로 공교육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혼란을 초래하는 실험적 제도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고교학점제는 1학년까지는 공통과목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2학년부터는 학생들이 선택과목을 골라 교실을 이동하며 수업을 듣는 형식이다. 그렇다 보니 과거보다 개설돼야 하는 강의 수도 많고 그에 따른 강의별 출결 및 생기부 작성 등 관리 업무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 학생들을 가르치고 관리할 교사부터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경북 소재 고교 교사는 “사회나 과학 교사들은 최소 자신의 전공과 별개로 두 과목, 많으면 4~5개 과목까지 가르치거나, 1~3학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 수업의 질 하락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일반적으로 선택과목 수업은 주 1회 1시간씩 진행되는데, 연간 30시간 수업으로 학생의 성취와 장단점을 평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최우성 경기 이천 다산고 교장 역시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현 고1은 5등급제 도입으로 등급 폭이 넓어져 1등급을 받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며, 조기 진로 선택에 따른 부모의 사교육 의존도 높아졌다”며 “교사들은 매시간 출결 입력, 학기별 강좌 개설과 운영, 생기부 작성 등 행정업무 부담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전교조와 교사노조 등에 따르면 고교학점제로 과목 수는 몇 배로 늘어났으나 학령 인구 감소를 이유로 교사 정원은 오히려 축소되고 있고 가르쳐야 하는 과목이 늘어나면서 수업 준비, 평가, 생활지도, 학생부 기록, 상담까지 교사 1명이 감당해야 할 몫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공동 교육과정 운영, 시간표 편성, 외부 연계 수업 관리 등 수많은 행정 업무를 교사들이 담당하면서, 학교 교육의 질 저하와 부실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데 있다.

 

지역별·학교별 격차 확대 문제도

고교학점제가 지역별·학교별 격차를 더 키우는 것은 물론 교육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교사 수가 적은 농·어촌·산촌 지역 학교의 경우 교사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탓에 개설할 수 있는 강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데다, 지역 내 학교 밀집도도 낮아 공통수업을 진행하기도 어려워 특목·자사고는 물론 서울·수도권 및 대도시 일반고와의 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종로학원이 고교별 고교학점제 개설 과목 현황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국 단위 자사고는 6개교가 평균 105.3개의 과목이 개설됐지만 지방 소규모 일반고 5개교의 경우 평균 75.6개 과목이 개설됐다. 학교별로 많게는 개설 과목 수가 2배 차이로 벌어지면서 격차가 드러나는 셈이다. 개설되지 않은 과목의 경우 온라인 등 ‘공동교육과정’을 통해 이수할 수 있지만, 지방 학생의 경우 타 고교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 등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교사단체 및 교육 관련 단체들은 고교학점제 시행으로 인한 교육 현장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교육부가 행정적 준비 부족과 실행력 미비 등의 시행착오를 시인하고 고교학점제 폐지 또는 전면 재검토나 유보 등의 보완대책을 시급히 내놓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충청 소재 고교 교사는 “학생들의 선택권과 자율성을 강화하고, 진로 학습을 강화하겠다는 고교학점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신이나 수능을 절대평가함으로써 학업 부담을 낮춰줘야 한다”며 “선택과목 수업을 무력화할 수 있는 수능 공통수학·공통과학 출제 방침, 대학 25% 무전공 선발 같은 정책들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성룡 1318대학진학연구소장은 “고교학점제의 혼란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은 ‘유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 정책 보완을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며 “이와 별개로 내신등급 절대평가, 수능시험 출제범위를 ‘2028 대입개편안’에 따라 공통과목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현행처럼 사회탐구, 과학탐구 선택과목을 포함시킴으로써 학교의 일반선택과목 수업 부실 또는 파행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우성 다산고 교장도 고교학점제의 안정적 정착을 위해 내신 절대평가 도입과 수능 출제범위 재검토, 교사 정원 확대 및 행정 인력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최 교장은 “교사들은 늘어난 선택 과목 운영과 진로 상담, 복잡한 시간표 편성 등으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며 “교사 확충 등 담임 및 전담 교사 중심 행정업무 경감 방안, 지역 공동교육 인프라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미영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